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사레 보르자(창세기전 시리즈) (문단 편집) == 평가 == 서풍의 광시곡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체사레의 행동 원리에는 철저하게 그 자신의 야망이 중심에 있었으며, 국가의 안위나 발전 등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분오열되어 제대로 된 군사력 발휘가 힘든 제국의 앞날을 쥔 귄력자임에도, 반란 진압을 하겠답시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비프로스트 공국|외세]]를 자국 영토의 절반까지 제시해가며 끌어들이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미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루벤 토벌전부터 등장한 유스타시아를 통해 일찍이 베라모드와 함께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에 이어 데이모스를 봉인한 두 암흑신과 손을 잡은 상태임이 드러났으며, 또한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정적을 상대한답시고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 [[파괴신(창세기전 시리즈)|파괴신]], [[아스카론(창세기전 시리즈)|적국의 마장기]] 같은 힘에도 거리낌없이 손을 빌리며 제국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웠다. 그리고 체사레의 이런 악행은 창세기전 4에서 이스카리웃의 [[그리마(창세기전 시리즈)|그리마]] 관련 생체 실험의 지원 및 체사레를 뒤에서 지원하던 유스타시아마저 과거 아르케에서의 [[퉁 파오]]를 떠올리며 회의감에 젖는 모습을 통해[* '아르케 시절 우리는 폭군 퉁 파오에 맞서기 위해 용병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 시절의 우리들이 지금 폭군과 손잡고 일하는 지금의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할까...' 라며 심란한 감정을 드러내고, 이에 디아블로는 '그 이야기는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우리는 대의를 위해 악인이 되기로 맹세한 몸이다'라며 과거 이야기를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창세기전 위키에서도 부정적인 묘사 일색이다. 그의 이러한 폭주가 결과적으로는 반대 세력의 집결을 불러일으키면서 제국령 통일로 이어지기는 했어도 체사레 보르자 본인 자체는 그런 제국 재통일에 어떤 기여라는 긍정성을 부여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부정적인 행보와는 별개로, 주신교의 불모지였던 제국령에 주신교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해 혼돈의 연속이었던 세력권을 다수 정리해 어떤 형태로든 질서를 정립시켰고 비프로스트의 원군을 통한 제피르 팰컨의 충돌까지 염두에 두어 교묘하게 판을 그리는 동시에[* 사실 흑태자의 힘의 계승자라는 이레귤러인 시라노 번스타인과 전혀 생각도 못한 팬드래건의 개입 외에는 대부분이 체사레의 계산대로 이뤄지는 편이었다.] 그 자신의 욕망과 아집에 기반했을지언정 추후 통일될 제국에 대한 일종의 비전[* 이는 시라노의 배드 엔딩에서 잘 묘사된다.]과 철학도 지니고 있었던 등, 권모술수와 행정적인 부문 및 대국을 다루는 혜안에 있어서는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두 암흑신을 상대로 해서도 위축되지 않고 받아낼 건 다 받아냈다는 묘사를 보면[* 창세기전4 고귀한 기사 아르카나 퀘스트에서 디아블로와 이루스에게 자신에게 반기를 들려했던 이단심문관을 처형한 후 '그녀의 목은 효수대에 걸고 몸은 이스카리웃에게 주었죠, 새로운 실험물이 생겼다며 기뻐하며 들고 갔지요' 하고 말하자, 디아블로조차도 악취미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이에 체사레는 '그 악취미인 사람을 뒤에서 지원해주는 건 두 분 아닌가요?' 하고 받아치고, 이에 두 사람이 울컥하는 반응을 보이자, '다음에는 두 분의 고견을 경청하겠습니다'고 말하며 능구렁이처럼 빠져 나간다.] 자기 목숨 챙기기에도 바빴던 창세전쟁 시절과 달리 그릇도 커져 어떤 의미로든 걸물이라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주신교를 기반으로 했을지언정 순수하게 제국령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만인에게 존경받을 만한 위인으로 거듭났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주신교 자체가 그 시점에선 창세전쟁의 진실의 왜곡과 그 유지를 위한 탄압을 전제로 해야 존재가 가능한 이념이었던 만큼 그가 순수한 의미에서 흠없는 위인으로 남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스스로의 야망 달성이 아닌 순수하게 제국을 위해서 노력했다면 일정 기간 주신교를 기반으로 힘을 다진 뒤 그를 바탕으로 다른 방향의 국가 시스템 전환을 꾀하는 건 그의 능력과 당시 영향력, 기반을 볼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배후에 있던 두 암흑신이 그걸 내버려둘리 없다는 건 제쳐두고 말이다.] 그렇게 쌓아올린 모든 것을 게이시르 제국령을 도탄에 빠뜨려가며 자기 야망을 이루는 것에만 동원한 결과 그에 따른 반대 세력의 준동과 집결도 그만큼 강해져 체사레 본인의 숨통을 끊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으니 [[자업자득]]. 그럼에도 후속작인 템페스트부터 그에 대한 안타리아 대륙 내에 상당히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는 묘사가 제시된다. '''제국의 무정부상태와 종교적 공백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갖은 일을 자행한 쓰레기'''라는 평가부터 '''제국의 재통일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 위대한 영웅'''이라는 평가까지 아주 다양하다는 것. 이런 상황을 묘사한 클라우제비츠는 그 뒤에 마키아벨리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인용했다. >당시의 제국은 창세전쟁으로 인해 흑태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재를 잃었을 뿐더러 심각한 권력공황 상태를 맞아 십여 개로 분열된 군소영주들에 의한 내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추기경에 의해 진행된 이른바 '악마재판'은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제국 세력의 재편을 급속히 진행시켜 세력이나 기반이 약한 영주들을 몰락시키고 자신을 비롯한 몇몇 군주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많은 피가 흘러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이후로 수백 년 동안 제국은 군소영주들의 세력다툼의 진흙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사후에도 그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어 제국의 혼란기가 최소화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내용과 크리스티나가 체사레의 권력을 물려받아 프레데릭의 군사력과 동반해 제국을 재통일했다는 설정과 창세기전 4에서도 체사레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고 묘사되었기 때문에, 일부 유저들 사이에서는 체사레가 생전에 남긴 제국 통일의 기반이 상당히 컸고 그 때문에 그의 성향과는 별개로 제국령 통일에 대한 기여는 그의 죽음을 통한 단결을 제쳐둬도 결과적인 것 이상을 넘어 상당히 큰 것 아니냐 하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 내의 엇갈리는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것이, 마키아벨리는 위의 평가와 더불어 '''체사레가 자신이나 자신의 반대 세력을 통한 제국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과도하게 권력 추구를 하는 등의 모든 일을 벌였다'''는 역사 왜곡 수준의 주장을 벌였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neoth&logNo=22066433731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출처]] 이는 후속작 메뉴얼이 아닌 템페스트 홈페이지에 기술된 내용이다. 서풍의 광시곡에서 체사레를 대하는 마키아벨리의 태도를 보면 마키아벨리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생전에도 클라우제비츠와 함께 제국령 최고의 현자로 불리면서 뒤에 리슐리외로 개명하여 제국 재상으로까지 등극하는 지대한 입지를 지닌 데다가 그의 저서인 군주론도 안타리아 대륙에 유명세를 탈 정도이니, 그런 그가 공공연하게 이런 주장을 일삼는 자체가 체사레의 평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자명하다. 애초부터 마키아벨리는 신 제국 재상 [[리슐리외(창세기전 3)|리슐리외]]로 활동하는 시절까지도 '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악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일반론으로 치환될 만한 평가가 못 된다. 게다가 체사레의 죽음 이후 홀로 망티고아 산 정상에 남아 있던 마키아벨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자비를 베풀어 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제피르 팰컨의 어느 누구에게라도 [[끔살]]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창세기전 공식 위키의 설명이 '자신의 사상을 통해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을 평가하려는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인데, 가치중립적인 [[사관#史觀]]적 평가가 아니라 주관적 사상이 들어간 [[프로파간다]]를 할 것임을 알고서도 보내 준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에 있었다. 그가 살아남은 건 어디까지나 클라우제비츠를 위시한 제피르 팰컨의 자비 덕분이었고, 결국 자신이 모시던 체사레가 그랬던 것처럼 리슐리외라는 가명을 쓰고서 철저하게 크리스티나를 비호하는 세력으로 변절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리슐리외의 권모술수와 정치공작 덕분에 크리스티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나, 망티고아 산의 결전으로 피폐해진 제국군 전력[* 전투 결과 게이시르의 수중에 남은 거라곤 어느 정도의 제피르 팰컨 출신 병력과 [[알프레드 프레데릭]] 사후 로우엔에 남겨진 수비병력 일부, 그리고 전투 중 사로잡힌 일부 제국군 포로들 정도밖에 없었다.]을 비롯해 [[주사위의 잔영 for Kakao]]에 나온 [[알바티니 데 메디치]]와의 인연 스토리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15살의 알바티니가 곧바로 친위대장에 임명된 이유 두 가지[* 하나는 크리스티나 입장에서 '황제 자리 오른 이후 믿을 놈 하나도 없고 정말 힘들었지만 알바티니는 부모님(로베르토와 이자벨)과 본인의 실력을 봐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뽑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바티니 입장에서 '부모님이 황제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 판단해서 친위대장에 지원한 것'이다.]까지 감안해보면 그런 정계 내에서 자신의 사상에 기반한 중앙집권화 창출을 위해서건 자신의 사상의 정당성 어필을 위해서건 뭐라도 끄집어내 체사레를 좋게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체사레의 무차별적인 마녀사냥 때문에 게이시르의 귀족 가문 상당수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쓸 만한 재원들이 남아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로베르토 데 메디치]]를 중심으로 한 메디치 가문이 건재한 채로 크리스티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보좌했기 때문에''' 리슐리외 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크리스티나를 떠받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정적으로 3 당시 리슐리외가 독백으로 "추기경 각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부분은, '''그 시점에서도 아직도 체사레의 진의를 완전히 알지는 못한 자'''로서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미이기에 더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메인 시나리오 라이터였던 최연규 前 이사 입장에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제국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으로, 이러한 연출은 마키아벨리-리슐리외를 비뚤어진 사상에 심취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로 묘사하고자 했던 동시에, 알바티니의 행동을 방조한 것까지 합쳐 알바티니가 가진 확신범으로서의 성격도 함께 묘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평가 여부를 별개로 보더라도, 창세기전 위키에서의 체사레 보르자 항목에선 제국령을 통일하겠다는 진심과는 달리 정작 "제국을 위한다"는 의식이 잘못된 곳에 맞춰져 있던 그의 과오를 바로잡은 뒤, '''올바른 제국 통일의 기틀을 닦은 이가 바로 손녀 크리스티나'''라 기술함으로써 체사레가 남긴 기반을 통한 기여의 가능성을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체사레의 피의 숙청을 통한 세력 정리 역시, 당시 제국령의 그 정리된 대영주령들 중 선정 통치 구역으로 언급된 사례가 [[에스테 도데]]의 리브레빌 지역과 [[알프레드 프레데릭]]의 로우엔 지역 단 둘 뿐이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체사레 본인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는 결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다. 결국 체사레의 세력 정리가 제국 통일에 결과적으로 기여하게 된 건 크리스티나가 집권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본인도 [[주사위의 잔영 for Kakao]]에서의 알바티니 인연 스토리에서 비프로스트 공화파의 지원 요청에 대해 절대 권력에 대항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고 말하는 등, 체사레의 시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였다. 그러나 체사레 본인이 생전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혼돈의 연속이었던 제국령에 처음으로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제국령 전체를 호령하던 거물인 동시에 그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세력의 집결이 제국령의 통일로 이어지면서 그 자신이 어떤 의미로든 게이시르 제국 통일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인물이 된 만큼, 게이시르 제국인들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체사레에 대한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도 특정 인물의 이런 생전의 영향력 때문에 실질적인 업적의 여부와 별개로 추종자가 다수 발생하는 케이스가 많다.] 여기에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통일된 제국이 번영일가를 달린 것과 마키아벨리의 상술한 프로파간다가 맞물린 결과, 체사레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리슐리외의 전략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전 4]] 액트6 '주신교의 멍에' 아르카나 저널에 나온 체사레 소개문을 보면, '제국을 피로 물들인 그의 행적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고 나와 있기 때문. 제국이 재통일되고 주신교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며 완전히 교세가 몰락한 뒤에도 체사레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생겼다는 설정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로 인해 파트2 메뉴얼북인 『Part.2 Visual Reference』에 '결과적으로 제국의 통일에 기여했다'고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던 부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이 통하게 되었고, 에피소드3 진행 당시 [[크리스티앙 데 메디치]]가 아스타니아 난민 출신 강도들과 싸울 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일부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에둘러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이 통하게 되었다. 체사레에 대해 논란이 많다는 설정은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템페스트]] 때부터 있긴 했지만, 이걸 재평가 단계에까지 끌어올리고 4 시점에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수준까지 이어간 건 전적으로 '살아남아서' 자기 상관을 철저하게 포장했던 리슐리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야가미 라이토|살아있는 동안 패악만 불러 일으키며 조국 게이시르를 몰락시킨 끝에 추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후대에 그 자신의 염원에 걸맞은 형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예를 얻는 것만큼은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분류:창세기전 시리즈/등장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